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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시민의소리 <오피니언> 새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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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한 작성일20-05-30 20:44 조회1,687회 댓글0건

본문

 

                                  

​                  새참

 

                                                           김성한 수필가

 

모내려고 물 잡아놓은 논에 산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햇살이 엿가래처럼 축 늘어진 오후, 내 뒷그림자는 거무스름한데

저 논물 거울에 비친 산 그림자는 푸르스름하다.

논물 거울도 싱그러운 오월 신록에 마음을 빼앗겼는가.

논둑 위로 올라선다. 논물 거울에 나를 비춰본다.

그 옛날 하얀 얼굴에 까맣던 머리는 어디로 가고 머리 훌렁 벗어진 중늙은이가 서 있다.

'대머리 늙은이는 논물 거울이 싫어해요.’

위 논배미에서 나를 지켜보던 백로가 한마디 던지며 후다닥 날아간다.

    

착착 착 윙윙이앙기 모내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건너편 논배미에서 할아버지가 이앙기로 모를 내고 있다.

숨을 헐떡이며 뒤뚱뒤뚱 걸어가는 이앙기 꽁무니에는 연 푸른 모가 줄을 그으며 따라간다.

물 잡아놓은 논둑길로 허리 구부정한 할머니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걸어온다.

얼기설기 묶은 보따리 귀퉁이에는 ㅇㅇ막걸리가 고개를 삐죽 내밀고 있다.

사람 복닥거리는 장터 골목에서만 지낸 막걸리. 그도 모내는 들녘이 궁금했던가.

일을 하다말고 할머니를 바라보는 할아버지 얼굴에 화색이 돈다.

할머니가 새참을 들고 오는 모양이다.

 

초등학교 시절 뻐꾸기 울어대는 지금쯤이면 모심기를 했다.

그 당시 모내기철이 되면 '가정실습'이라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꼬맹이들도 사나흘은 학교에 가지 않고 농사일을 거들었다.

모내기하는 날, 두레꾼 대여섯 사람은 이른 새벽녘부터 모판에서 모를 찌고,

아버지는 흙탕물 가득한 논에 암소를 부려 써레질을 했다.

이랴 이랴 워워아버지의 소모는 소리에 암소 목덜미 워낭이 딸랑딸랑 대답했다.

써레질 끝난 무논에는 제비 떼들이 몰려와서 한바탕 춤사위를 벌였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한 모내기가 오전 반나절이 지날 때쯤이면,

어머니는 새참을 머리에 이고 타박타박 논둑길을 걸어왔다. 막걸리 주전자도 함께 왔다.

어머니가 내려놓은 놓은 새참 소쿠리 안에는

지난 오일장에서 사 온 고등어구이 몇 마리와 맷돌에 갈아 만든 두부조림이 들어 있다.

모두 얼굴에 흙을 묻힌 채로 막걸리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켠다.

이럴 때면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살진 바람도 막걸리 한 잔을 마시고 간다.

도회지 학교에 다니는 자식들 공납금 얘기에 농주(農酒) 들이켜는 속도가 빨라진다.

수심(愁心) 가득한 얼굴들이 금세 불콰해진다.

 

사람이 살다 보면 정해진 시간에 꼬박꼬박 찾아 먹는 세끼 식사보다,

중간에 먹는 새참 같은 삶이 그리울 때가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연 보다 조연의 연기가 더 맛깔스러울 때가 있듯이.

 

지금 농촌에서는 논밭 둑에 삥 둘러앉아 새참 먹는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누구네 집 할 것 없이 젊은이들은 도회지로 떠나버리고

나이 드신 어른들만 집을 지키고 있는 터라 새참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가끔은 빵 몇 쪼가리에 커피로 새참을 대신한다는 얘기가 들린다.

 

노부부가 논둑에 앉아 새참을 드신다.

할아버지가 막걸리 한 사발을 쭉 들이켜자

할머니가 부침개를 손으로 찢어 할아버지 입에 넣어준다.

애옥살림에도 끊임없이 내주며 살아온 삶,

농사지어 튼실한 것은 자식들한테 보내고 못나고 흠 있는 것은 당신들 몫이리라.

노부부의 소박한 삶이 써레질해놓은 무논에 일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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